계획이 없던 시기가 유난히 또렷하게 기억되는 이유

돌이켜보면 이상한 기억들이 있다. 당시에는 분명 아무 계획도 없었고, 무엇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감각조차 희미했던 시기였다.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라고 하면 막막해지지만, 그 시기의 공기나 리듬은 유난히 선명하게 떠오른다. 무엇을 성취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그때의 상태는 또렷하다.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기억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획이 없던 시기는 쉽게 흐려지지 않고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 글은 계획의 중요성을 부정하려는 글이 아니다. 다만 계획이 없던 시간이 왜 기억 속에서 다른 밀도를 갖게 되는지, 그 감각의 구조를 천천히 따라가 보려는 기록이다.

우리는 보통 계획이 있었던 시기를 의미 있는 시간으로 분류한다.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향해 움직였으며, 결과로 남길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던 시간이다. 반대로 계획이 없던 시기는 공백처럼 취급된다. 그 시간은 방향을 잃은 채 흘러간 것으로 평가되기 쉽다. 하지만 기억은 늘 그런 평가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계획이 없던 시기가 더 또렷하게 떠오르는 이유는, 그 시간이 비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계획이 사라지며 현재가 전면에 놓일 때

계획이 있을 때 우리는 늘 앞을 본다. 다음 일정, 다음 단계, 다음 목표가 현재를 밀어낸다. 지금 이 순간은 곧 지나갈 통과 지점처럼 취급되고, 그 자체로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계획이 촘촘할수록 현재는 얇아진다. 하루는 빠르게 지나가고, 나중에 돌아보면 결과만 남는다.

반면 계획이 없을 때 현재는 전면에 놓인다. 무엇을 향해 가야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시선은 자연스럽게 지금에 머문다. 시간을 채워야 한다는 압박이 약해지고, 그 대신 지금의 감각이 또렷해진다. 빛의 변화, 몸의 컨디션, 생각의 흐름 같은 것들이 계획에 가려지지 않고 그대로 인식된다. 이 상태에서의 시간은 사건으로는 빈약해 보여도, 감각의 층위에서는 오히려 밀도가 높다.

압축되지 않은 시간이 남기는 기억의 형태

계획이 있는 시간은 빠르게 압축된다. 우리는 그 시간을 일정과 결과를 중심으로 정리한다. 무엇을 했는지, 어디까지 왔는지를 기준으로 기억을 재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감각은 삭제된다. 남는 것은 성과와 실패, 혹은 그에 대한 평가다.

하지만 계획이 없는 시간은 압축되지 않는다. 무엇을 했는지 한 문장으로 요약하기 어렵고, 대신 여러 장면과 감정이 느슨하게 이어진다. 이 느슨함은 기억을 흐리게 만드는 대신, 결을 남긴다. 그래서 나중에 떠올릴 때도 하나의 결과가 아니라, 분위기와 상태의 연속으로 재생된다. 이 점이 계획이 없던 시기를 유난히 또렷하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다.

평가의 바깥에 놓인 시간

계획이 없던 시기는 평가의 기준에서도 벗어나 있다. 무엇을 이뤘는지, 얼마나 나아갔는지를 따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간은 성공이나 실패로 분류되지 않는다. 이 분류 불가능성이 기억을 자유롭게 만든다.

평가되지 않은 시간은 수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보통 기억을 떠올릴 때, 잘된 부분은 강조하고 아쉬운 부분은 덜어낸다. 하지만 계획이 없던 시기는 그런 편집 과정을 거의 거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시간은 있었던 그대로 남는다. 꾸밈없이 기억되는 이유는, 그 시간이 평가의 손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무름의 경험이 만들어내는 밀도

계획이 없다는 것은, 당장 어디로 가야 하는지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때 우리는 이동보다 머무름에 가까운 상태에 놓인다. 머무름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지 않는다. 대신 현재에 머문 채로 천천히 쌓인다.

이 머무름의 경험은 나중에 돌아봤을 때 분명한 질감을 가진 기억으로 남는다. 무엇을 했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아도, 그때의 상태는 또렷하게 재현된다. 그래서 계획이 없던 시기는 막연한 공백이 아니라, 하나의 분명한 시기로 기억된다. 그 시기는 성취로 설명되지 않지만, 감각으로는 분명히 존재한다.

계획이 없던 시간을 다시 바라보는 방식

계획이 없던 시기가 또렷하게 기억된다고 해서, 그 시간이 더 나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시간은 다른 방식으로 살아낸 시간이었다. 성취를 향해 달려가기보다는, 현재의 감각과 함께 머물렀던 시간이다.

어쩌면 계획이 없던 시기가 유난히 또렷하게 남는 이유는, 그때 우리가 삶을 평가하지 않고 그대로 통과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잠시 내려놓았던 시간, 그래서 기억이 편집되지 않았던 시간이다. 이 글은 계획을 내려놓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계획이 없던 시간이 왜 기억 속에서 다른 밀도를 갖는지, 그 이유를 천천히 따라가 보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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